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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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편지로 여는 세상 13집

결혼 30주년을 함께하는 사람
이 서 화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이제 봄볕 따사로운 기운에 얼부푼 채로 봄을 맞이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들과 함께 곧은치를 경유하여 향로봉까지 다녀왔어요. 그날 우리는 계곡을 오르다가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숨죽이고 한참이나 듣기도 했답니다. 참으로 정겨운 멜로디였지요. 당신과 단둘이서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코스였습니다.
오늘은 한가롭게 옷장 정리를 하다 말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네요. 당신이 집을 비우는 당직근무 날을 잡아 미리 봄맞이 정리를 한다고 옷장을 다 뒤집어 놓았지요.
그런데 서랍 속에서 20여 년 전에 내가 쓰던 일기장이 나오더군요. 잠시 동안 일기장을 뒤적이다보니 그 속에 편지 한 통이 들어있더군요. 결혼 전에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냈던 단 한 통의 편지랍니다.
편지 내용 중에는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 위에는 꽃이 있고 우리의 가슴속에는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괴테의 말을 적어 놓았더군요. 갑자기 얼굴이 간지럽고, 달아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내가 당신에게 편지 한 통을 제대로 보낸 적이 없더군요. 몇 번 쪽지를 전한 기억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과는 다르게 당신에게는 속내 한번 드러낼 사이가 없었는데, 어느새 세월이 29년이나 흘렀습니다.
당신은 올해가 우리의 결혼 30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지 묻고 싶네요. 당신의 대답은 뻔하겠지만, 나는 눈물 나는 감동스런 이벤트는 고사하고, 당신이 늘 그랬듯이 올해도 또 잊어버릴 것 같아 이렇게 미리 경고장(?)을 보내는 것이랍니다.
문득, 결혼 25주년 그날에 휴가를 떠났던 일이 생각나네요. 섬진강에 가보고 싶다는 나를 위해 그날 둘이서 여행을 떠났었지요. 고속도로를 진입하여 신나게 달려가다가 전화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불이 났다는 말에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집은 우리가 결혼 후 처음으로 직접 지은 집이었기에 많은 애착을 가졌었지요. 전기 과부하 때문에 아래층 건물 내부는 이미 다 타버린 상태였습니다. 우리 동네로 소방차가 모두 모여 난리였다며 놀란 이웃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지요. 제가 운영하는 학원 내부도 불길에 그을려 모든 게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말을 하지만 당신은 그날 매우 침착하고, 일사불란하게 모든 것을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심 놀라웠어요. 그날 당신의 늠름한 모습에서 나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혼 25주년 기념여행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나는 슬프지 않았어요. 당신과 함께할 희망찬 내일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보다 가정을 위해 헌신해 온 당신께 이제야 비로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빠가 필요한 시기에 직업의 특성상 늘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어느 때부터 아이들이 아빠를 찾지도 않고, 오히려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며 혼자 속 태우며 당신을 원망도 했었답니다.
이제 아이들도 곁을 떠나고 우리 둘이 남아 단출하고 모든 게 예전보다는 여유로운데, 나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이제부터는 투정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엎드려 절을 받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여보, 명준 씨.
당신은 ‘사랑이 있는 한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했지만, 그 사랑은 상대의 고통과 마음까지 껴안아주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은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쑥스럽다고 지금껏 한 번도 못하였지요. 그러나 언젠가 가끔 팔목이 저리다는 나를 위해 한참 동안 힘껏 안마를 해주며 이 정도는 평생 서비스를 하겠노라던 말이 내게는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고마웠답니다.
내가 당신에게 진정 바라는 것이라면, 지금까지처럼 늘 당신의 자리를 지켜주고 당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여보, 지금 당장의 소원은 따로 있답니다. 아주 쉬운 건데요, 우리 결혼기념일이 무슨 요일인지 달력에서 한번 찾아봐 주세요. 그리고 또 잊어버리지 않도록 꼭 표시를 해두세요.
오늘 하루 나는 당신 가슴속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당신은 이 편지에서 나의 체온을 느끼며 늘 따듯한 아내로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2011년 3월 봄볕 따사로운 날
당신의 아내가

(작성일 : 2011년 06월 26일 (20:51), 조회수 : 1868, IP : 128.134.1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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