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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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편지로 여는 세상 7집

<얼굴이 고우신 장 할머니께>

강병숙(서울경인지회)

할머니! 어제는 제가 넓은 세상 한 귀퉁이를 맑은 유리 틈으로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한 번 가야지 하면서도 빠듯한 시간에 꼬리가 잡혀 늘 망설이다가 버럭 나선 어제였습니다. 작은 메모지 한 장 주머니에 넣고 버스를 타고 창밖에서 반짝이는 겨울 햇살에 할머니 동네의 주소지를 비춰가며 서울 시내를 마구 마구 달렸습니다.
한번에 봐도 길을 헤매는 승객 같았는지 기사 분은 운전대 앞에 있는 거울을 보고 어디까지 가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주소지를 또박또박 대면서 어디서 내려야 좋겠느냐고 했더니 이 차의 종착역 바로 앞에서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차안의 사람들이 거의 다 내리고 썰렁한 버스는 저를 마저 내려주었습니다. 길가는 학생을 붙잡고 또 할머니 주소지를 보여주니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아파트가 보일 거라고 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오르고 찾아간 그 곳에 경비아저씨가 상세하게 복도까지 일러주셨고 할머니 현관 앞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초인종 소리에 "누구요?"하고 얼굴을 내미신 할머니의 목소리는 꼭 방송에서 들어본 그 음성이었습니다. 맞게 찾아왔다는 안도감에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 할머니께서는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얀 피부에 가녀린 모습은 첫눈에 뵈어도 젊은 시절에 얼마나 고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덥석 잡아주신 손에서 첫 만남의 서먹함은 금세 뗄 수 있었고 따뜻한 아랫목에 편히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추운 날 찾아오시면서 수고 많았소" 연신 미안한 표정으로 저를 맞아주시는 할머니의 눈빛에서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답니다. 즐겨듣는 방송에서 할머니를 발견하고 언젠가 한번 찾아뵈야지 하는 생각에 연락처를 적어 놓고 그렇게 먼 시간을 보내고서야 할머니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저쪽에서 곤히 자고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 저 애가 장애자인 내 막내아들이라오., 1급 장애자라 말도 못하고 지능이 초등학교 1학년도 못되지만 그래도 옆에 있으니 든든하고 이렇게 둘이서 마주보며 살아가고 있다오" 말씀하는 목안이 메인 것 같은 할머니의 음성에서 그늘 진 곳에서의 단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동안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래도 연신 옆에서 "편하게 앉으시라오" 하며 평안도 사투리로 저를 대해주셨고 우둔한 제 윗도리까지 벗으라고 해 주셨습니다. 평양이 고향이라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은 유복한 가정의 자녀였지만,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에 이산가족이 되셨고 외로움과 설움으로 한평생을 살아오셨더군요. 고향의 하늘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할머니 말씀에는 우리나라 모든 이산가족의 아픔을 잠시나마 헤아릴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몇 년 전 풍으로 쓰러지셨어도 어려운 형편 때문에 병원 한 번 못가보고 오직 민간요법으로 솔잎을 따서 차로 드시면서 할아버지의 간병을 받으셨다 하니.., 두 분의 금실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삼년 동안이나 방안에서 볼일을 보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면서요.
그런 할아버지께서 이젠 세상을 뜨시고 더욱 외로워지신 할머니를 이웃은 외면하지 않았더군요. 가까운 복지관에서 생활보호대상자 명단에 올려 주셨고 지금은 그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계신다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끔 매스컴에서 우리나라 사회복지에 대해 말들을 듣게 되면 그저 그런 게 있겠지 했는데 실제 할머니 말씀을 듣고보니 우리나라도 사회복지에 대해서 많은 발전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시고 계신 아파트가 영구임대 주택이라는 것에는 재개발을 하게 되면 임대주택을 필수적으로 넣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가기도 하면서요. 덩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이런 게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관심밖에 잇는 일들로 여기며 살아온 지난 날이 부끄럽기도 했고요.
할머니, 올 생신은 두번을 치루셨다고요.
복지관에서 차려주시고 MBC 여성시대 식구들이 차려 주셨다니 고마운 분들이 저를 숙연케 했습니다. 생일축하 꽃바구니에 꽃잎은 시들었어도 꽃대궁이 아직 생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생신 지난지가 얼마 안 되었음을 짐작하면서 환히 웃는 할머니의 주름진 미소에선 이 세상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주신 음료수도 복지관에서 사다 넣어 주셨다고 하니 그 맛이 한없이 감미로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하는 데 한잔의 청량음료가 정성과 사랑이 배어 많은 이웃을 녹이고 감싸안은 것에는 무엇보다 우리의 이웃이 따뜻해지고 있음을 실감케 했습니다.
할머니, 제가 조금 드린 청국장 맛나게 해 드셨어요? 청국장이란 특유의 냄새때문에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한 덩어리 가지고 갔는데 그렇게 좋아하시더군요. 원 재료인 콩은 제 고향에서 구해가지고 왔고요. 숙성과정은 저의 집 안방에서 재래식으로 만든 겁니다. 워낙 냄새가 고약해 아무나 주기에는 많이 망설여야 하는 식품인지라 그래서 아주 조금 가지고 갔는데 그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잘 아는 이웃에는 좀 넉넉히 주면서 할머니를 조금 드린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할머니,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후딱 뛰어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아쉽긴 하지만 가끔은 틈이 나면 찾아뵙겠습니다. 늘 밝은 마음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는 할머니이시기에 덜 외로우리라 믿겠습니다.
건강하게 계시다가 또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그때도 어제처럼 현관 앞까지 나오셔서 멀어져가는 저에게 손 흔들어 주실 것을 믿으며 오늘은 이만 줄이렵니다.

2005년 1월 21일
강병숙 드림.

(작성일 : 2005년 07월 26일 (09:27), 조회수 : 2809, IP : 211.105.78.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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