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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쓰는 사람들의 모임인 ‘한국편지가족 서울경인지회’ 회원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류정호 회장, 최평자, 박명자, 신금선, 이현용, 심재순, 최경자 씨. |
요즘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주고받는 짧디 짧은 글들이 ‘디지털’의 상징이라면, 줄이 그어진 편지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는 ‘아날로그’다. 이 시대에 아날로그는 이미 추억이다. 빛바랜 편지지처럼 일상 속에서 퇴색해가는 편지문화를 고집스럽게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다. 편지 쓰는 사람들…. 가을 단풍처럼 자기 색깔을 지닌 이들이다.
“가게 한켠에서 편지를 쓰고 있으면 손님들이 ‘뭐하세요?’라고 물어요.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하면 ‘요즘도 편지 쓰는 사람이 있네’ 하며 신기한 듯 바라본답니다.”
서울 풍납동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최경자씨는 1주일이면 2~3통의 편지를 쓴다. 친지나 친구, 이웃 등 가까운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간단한 내용이지만 정성껏 쓴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받는 사람의 이름을 꼭꼭 눌러 쓸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단다.
편지 쓰는 사람들의 모임인 ‘한국편지가족 서울경인지회(www.letterfamily.pe.kr)’의 ‘왕언니’로 불리는 최평자씨는 “글자를 깨친 후부터 편지를 쓴 것 같다”는 타고난 편지꾼. 지금도 남편과 자녀들에게 곧잘 쪽지편지를 건넨다.
“또 편지야! 말로 해, 말로!”하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보면 편지는 언제 받아도 즐거운 ‘선물’인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 최씨는 ‘편지의 힘’을 절감했다. 방황하는 아들의 마음을 잡아준 게 바로 ‘편지’였기 때문이다.
펜팔로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에 골인한 이현용씨는 우체부 아저씨에게 미안할 정도로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여고시절 퀴즈에 당첨돼 잡지에 이름과 주소가 실렸는데, 그걸 본 남학생이 자기도 ‘이현용’인데 궁금하다”며 시작된 펜팔이 결혼으로 이어져 동명이인 부부로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보내는 사람도 이현용, 받는 사람도 이현용이어서 가끔은 자기가 쓴 편지를 자기가 받는 경우도 있었단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 좀더 여성스럽고 예쁜 예명을 사용할까 했지만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인데 예명을 쓰느냐”는 남편의 반대 때문에 그만두고 말았다. 지금도 이씨는 편지를 자주 쓴다.
“얼마 전에 친지가 병환으로 입원해 계셨는데 잡지에서 약탕기를 오려 붙이고 쾌유를 바라는 편지를 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어요.” 보통 편지는 쓰다보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느리게 전달된다. 그러는 동안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과 정성이 숙성된다. 그래서 편지는 ‘편지’ 이상의 감동과 향기를 준다.
편지쓰기 모임을 이끌고 있는 류정호 회장은 “편지 쓰기야말로 경쟁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대부분의 일(사고)들이 너무 급해서, 한번 더 생각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고 지적한다. 되씹고, 곰삭이는 편지 쓰기야말로 바쁜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성찰을 주는 ‘생활 속의 영양제’가 아닐까.
디지털시대에 느리게 써지고, 느리게 전달되는 편지는 많은 핸디캡을 갖고 있다. 그게 ‘편지의 숙명’이다. 그런 편지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좋고 화려한 것만 좇지 않고 남의 단점도 너그러이 봐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이들이다. 또 늙지 않는 ‘불로초’라도 들어 있는지 ‘편지 모임’의 사람들 대부분 40~50대의 아줌마들인데도 다들 소녀 같았다.
‘어떤 사람들이 편지를 쓸까? 어떤 사람들이 편지를 써야 할까?’ 류회장은 대화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버석버석하다고 생각될 때 편지를 쓰라고 권한다.
원래 편지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비밀의 통화구(通話口)였다.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는 디지털 시대에 진정으로 관계와 관계,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이 편지가 아닐까.
“참! 기자님, 이것 좀 꼭 소개해 주세요. 오는 29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 구의동 동서울우편집중국(2호선 구의역 3번 출구)에서 ‘중학생 편지쓰기 대회’(문의 02－2204－1438)를 하거든요. 많이 와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상품도 푸짐하고, 모처럼 편지를 써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텐데….”
한때는 시키지 않아도 잘만 쓰던 편지. 이제는 백일장 문화행사가 되어버린 편지. 손때 묻어 낡고 해진 편지봉투, 그 속엔 메시지가 아니라 체온과 정이 담겨 있었다. 이 가을 어느 누구의 책상서랍속에 처박혀 있을 편지에 그리움을 담은 안부를 전한다.
〈글 김후남기자 khn@kyunghyang.com〉
〈사진 김영민기자 viola@kyunghyang.com〉
